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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나안교회

2018.10.14(주), 길위의가나안교회에서의 종로길 순례

요수엘(기윤실맨) 2018. 10. 24. 11:48

종로길 순례

옥 성 삼

(연대 겸임교수)

조선의 시간은 종로에서 시작되고, 한반도의 모든 길은 종로로 통한다

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에 근거한 계획도시로 건설된 한양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

묘, 우측에 사직을 먼저 만든 후, 수도를 둘러싼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한양도성으로 울타리

친다. 도성 사방엔 사대문과 사소문을 두어 출입을 관장했다. 사대문의 이름은 방향보다는 우

주만물이 운행하는 오행(五行)에 바탕을 둔 오덕(五德)-인의지예신-을 부여하여 천지인(天地

人)의 조화가 역동하는 공간을 이루고자 했다. 경복궁 남쪽 지금의 세종대로에 관공서인 육조

거리를 두었고, 돈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약 3km 거리에 시전행랑을 짓고 육의전을 중심으로

시장거리를 만들었다.

한양의 시간은 도성의 중심에 종루를 짓고 큰 종을 두어 하루의 시작(파루, 새벽 4시 타종,

33층의 하늘을 깨움)과 끝을(인정, 밤 10시 타종, 28개 별자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밝힘)

알렸다. 이로써 도성 사대문으로 연결되는 십자가(十字街) 지역인 종로는 성리학의 시간과 공

간이 구현되는 공간이자 장터의 사람이 분비는 운종가(雲從街)이기도 했다. 보신각이 있는 종

로 사거리는 시장이자 정치를 논하는 광장이며 종교의례와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한국의 아

고라(agora)이고 포룸(forum)이었다. 120년 전인 1898년 봄부터 겨울까지 대한제국의 국운이

풍전등화 같은 시기에 독립협회 주도로 종로에서 개최된 ‘만민공동회’는 관료와 개화 엘리트

는 물론 백정이 시민대표로 연설하는 근대시민운동의 토양이 되었다.

대중선교와 독립운동의 요람 종로

정동이 개화와 선교의 발상지라면, 종로는 승동교회, YMCA, 태화여자관 등 복음의 빛이 반상

과 남녀 차별을 혁파한 곳이고, 성서공회와 예수교서회 등을 통한 대중선교를 꽃피운 곳이다.

도성의 중심으로 전망이 좋은 태화정(太華亭)이 있던 별유천지 6호실(현 중앙교회 남쪽)은 내

년이면 100주년이 되는 3.1만세운동의 발상지 이기도하다. 장로교와 감리교가 정동을 떠나 종

로로 선교지를 넓히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. 하나는 재동(현 헌법재판소)에 설립

된 최초의 국립병원 제중원이 1886년 11월 구리개(현 을지로 입구)로 이전되어 활발한 의료

선교활동을 했고, 다른 하나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정동 선교부가 초기 10여년의 활동을 통해

의료 및 교육은 물론 교회설립 등 나름의 노하우와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다.

장로교에선 1892년 9월 내한한 무어(S.F. Moore) 선교사가 1년도 지나지 않은 1893년 봄 미

동(현 롯데호텔 근처)에 한옥을 구입하여 곤당골 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시작된다. 개울 건너

제중원의 과 곤당골 교회는 의료활동과 전도로 협력한다. 어느 날 돌림병으로 죽게 된 백정

이야기를 들은 무어는 제중원 원장 애비슨과 동행하여 그를 살린다. 황제의 시의가 직접 왕진

하여 백정을 살린 것에 감동한 백정 박성춘은 이후 장로가 되어 전도와 봉사에 헌신한다. 반

상의 구분과 문화적 차이는 이후 양반중심의 홍문섯골 교회와 안동교회의 분립을 가져오지만,

무어선교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복음의 만민평등성을 지키고 심어주었다. 이후 승동교회는

김원벽 을 중심으로 서울시내 학생들의 삼일운동 구심점 역할을 감당한다. 현재 승동교회 예

배당은 3번의 증개축이 있었지만, 1903년 건축된 붉은 벽돌 고딕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옛 자

취를 느껴볼 수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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